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토 카리우스 (문단 편집) == 호랑이, 날다 == || [[파일:external/ep01.epimg.net/1422568972_828358_1422569160_noticia_normal.jpg|width=100%]] || || [[파일:external/www.flamesofwar.com/Carius3.jpg|width=100%]] || || 티거 전차 전차장 시절의 카리우스 || 오토 카리우스가 소속된 부대는 제502중전차대대[* 그 중 제2중대의 소대장.]으로서 1942년 겨울 [[레닌그라드]] 방면에서 최초로 티거를 실전에 운용한 부대이기도 했다. 오토 카리우스에 대한 부대원들의 첫 반응은, 티거가 최초로 보급될 당시 그들의 티거에 대한 인상인 '고놈 참 딥다리 못 생겼다.'에 버금갈 정도로 안 좋았다. 한마디로 '이렇게 허약하게 생긴 멸치같은 새퀴가 대장 노릇하며 제대로 싸울 수나 있겠어?'였다.[* 델차이트 상사와 제프 리거 상사가 이렇게 노가리를 깠지만 나중에는 둘도 없는 전우가 됐고 종전 이후에도 매번 만났다.] 그러나 이후 뛰어난 실력을 과시하며 모두를 순식간에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리고 502 중전차대대 2중대의 경우 중대장들이 너무 자주 바뀌거나 혹은 지휘력에 문제가 있어[* 대표적인 인물이 폰 슐러이다. 무전수 쇼트로프가 그의 뻘짓에 열받아 욕설을 퍼붓고 폭행을 시도하다 구금된 사례도 있고, 슈트라흐비츠 작전을 시원히 갈아마시고 백작에게 신나게 욕을 먹기도 했다. 다만, 그 상황이 백작의 부재중에 발생한 일이라 군법회의는 열지 않았다.] 카리우스가 한동안 중대장 대리로 사실상 지휘를 책임졌으며 중위 진급후에는 중대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카리우스가 당시 소위였는데도 불구하고 소대장 겸 중대장으로서 행동할 수 있던 이유는 다른 소대장들은 부사관이었기 때문으로 본래 독일군은 개전 이래 만성적인 장교 부족으로 부사관이 소대장을 맡는 경우가 많은 편이었다. 덕분에 소련군은 오토 카리우스를 직접 지목하면서 "그 녀석을 소련군에게 넘겨주면 소련군 보병 30명을 취향대로 골라서 포로로 잡을 수 있도록 하겠다."라는 선전방송을 독일군 보병에게 확성기로 외칠 지경이었다. 내용도 말이 안될뿐더러 소련군이 며칠 동안 계속 떠들어대자 제대로 열받은 독일군은 [[야포]]로 확성기를 날려버렸다. 정작 카리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가소롭다는 듯이 무시했지만, 보병들이 시끄럽다고 포병을 불러 부쉈다 한다. 게다가 이 선전방송은 마르나파 전투 한참 전의 상황이므로 해당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는 얼마나 오토 카리우스의 값어치가 높아졌는지 모를 지경이다. (후술하겠지만) 오토 카리우스가 부상을 입고 후송되면서 오토 카리우스 소유의 지도판을 분실했는데 이걸 습득한 소련 육군 장교가 내가 오토 카리우스를 죽였다고 증거품으로 지도판을 제출했고 이 장교는 소련에서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선전방송이 있었다는 사실을 오토 카리우스가 병원에서 들었다고 한다. 제502중전차대대가 주로 동부전선의 북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발트 3국에서의 지연전에서 활약을 펼쳤는데 가장 유명한 전투로는 나르바 방어전과 '오토 카리우스판 [[빌레르보카쥬 전투]]라 일컬어지는 마르나파 전투[* 여기서 오토 카리우스는 [[IS-2]] 전차를 처음으로 보았다. 처음에는 티거 2를 소련군이 노획한 줄 알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군이라고 생각해서 잠시 발포를 망설였다고 자서전에 서술했다.]가 있다. 이 전투에서 카리우스는 단 8대의 티거로 선발대인 소련군 [[IS-2]] 17대, [[T-34-85]] 5대, 도합 22대를 격파하고 적 여단장의 시신에서 기동계획이 표시된 지도를 노획하고는 후속하던 본대 28대의 적 전차를 매복으로 섬멸, 소련군 1개 전차여단을 격파해버렸다. 이 전투는 당시 소련군의 기습으로 전선이 무너지고 독일군 전체가 공황에 빠져서 도주중이던 상황에서, 전장에서 탈출하던 한 연락장교[* 이 사람은 당연히 카리우스가 적진으로 가는걸 말렸는데 무시하고 반격하러 가니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전장에 뒤따라 왔다가 경악하게 된다.]로부터 단편적인 정보만 전해 듣고 카리우스의 독자 판단으로 '''본인의 중대만 이끌고 반격에 나서 아무 손실 없이 적 1개 전차 여단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고 무너진 전선을 틀어막은 것이다.''' 특히 이 소련군 전차여단은 스탈린의 이름을 딴 제1이오시프 스탈린 전차 여단이었고 심지어 전투후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살된 이 전차여단의 여단장은 레닌 훈장까지 받은 장교였다고 한다. 더 무서운 점은 소련군 전차부대의 집결지를 발견했을 때 카리우스의 2중대는 티거 8대가 가용했지만 지형이 좋지 않아 기동할 수 있는 곳이 제한되어 티거 여러 대가 기동하면 서로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자신과 [[알베르트 케르셔]] 상사[* 1916년 3월 29일 출생, 2011년 6월 12일 사망했다. [[바이에른]] 출신,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은 인물로 케르셔 역시 100대 이상의 전차를 격파하여 격파 순위 12위의 에이스이다. 전후 카리우스가 보증을 서서 자녀들과 취업하여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에서 벗어났다. 처음 만났을 때 카리우스는 케르셔의 집안사정을 보고 [[충공깽]]했다고 한다.]의 단 2대만으로 돌진해 근접전을 벌였다. 나머지 중대 전차 6대는 주변의 감제고지로 이동해 소련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어찌나 신속하게 파괴해버렸는지 이 선발대는 '''후속부대에 무전으로 경고도 보내지 못했다.'''[* 소련군의 대부분은 마을을 약탈하기 위해 전차에서 떠난 상태였다고 한다.] 결국 뒤따라오던 본대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당했다. 이 전과로 오토 카리우스는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마르나파 전투를 [[미하엘 비트만]]의 빌레르 보카쥬 전투와 비교하자면 다음과 같다. 빌레르 보카쥬는 영국군이 제대로 정찰도 하기 곤란한 상황에서 우연히 적의 행군대열 측면에 위치한 비트만이 기습을 가한 상황이었고, 그나마 직접 격파한 영국 전차는 8대, 그것도 티거를 잡기에는 화력이 형편없는 [[크롬웰 전차]]나 아예 무장도 없는 포병관측반용 [[M4 셔먼]]과 [[스튜어트 전차|스튜어트 경전차]]가 상당수였다. 흔히 알려진 27대는 중대원 전부가 올린 전과를 합산한 것이다. 물론 이 일격으로 독일군의 빈틈을 노린 영국군의 대규모 포위기동을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니 전략적 효과는 충분했지만 이른바 원맨 쇼의 상황은 카리우스쪽이 더 높다. 당장 [[IS-2]]는 티거를 쉽게 잡을 수 있고 [[T-34-85]]도 티거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카리우스가 상대한 전차 수도 비트만의 27대보다 거의 2배에 가까운 4~50대로 훨씬 많았으며, 해당 전투지역에는 늪지대가 많아서 가뜩이나 무거운 티거가 제대로 기동전을 펼칠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마르나파 전투의 전술적 난이도가 더 높다. 마르나파 전투도 경험이 부족한 소련군이 경험이 풍부한 독일 전차 승무원들을 상대로 일방적으로 털린 전투라고 보면 된다.[* 나중에는 이와 비슷한 경우로, 독일군이 티거를 정차해두고 마을로 들어갔다가 소련군한테 티거를 노획당하는 사건도 생긴다.] 오토 카리우스도 38(t) 전차를 몰던 초창기 시절 승무원들이 물자를 구하기 위해 전차를 떠난 상태에서 습격을 받았고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도 못하고 도주하다가 정신차리고 보병과 함께 반격하여 격퇴한 전적이 있다. 즉 경험이 부족한 소련군이 오토 카리우스와 똑같은 실수를 범했고 결국 전차여단의 괴멸이라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몇몇 전투에서 구식 큐폴라를 가진 티거들이 큐폴라에 직격탄을 맞는 바람에 전차장이 부상을 입곤 했는데, 오토 카리우스도 마침 흡연을 하려고 고개를 숙인 틈에 큐폴라에 직격탄을 맞은 적이 있다. 덕분에 전사할 위기는 간신히 넘겼으나 머리가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관자놀이에 포탄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마르나파 전투가 끝나고 이틀 후인 1944년 7월 24일 자신의 전차에서 하차한 후 전선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매복한 적의 공격에 의해 [[오토바이|모터사이클]]이 피격되어 목을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이때 몸무게가 39kg까지 빠진다. 이미 카리우스는 그 전에 4번이나 부상을 당했고 이 때는 다리 1발, 등 4발, 왼팔 1발, 목 1발의 총 7발의 총상을 입었는데 살아남았다. 오토 카리우스를 죽이려던 소련군 장교가 독일군이 오는 걸 알고 급히 쏘다 한발은 빗나가고 한발은 경동맥을 피해갔다. 저서 진흙속의 호랑이에 따르면 그가 이 사건 이후 총을 맞았을 때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총을 맞을 당시에는 흥분하고 탈진했으며, 과도한 출혈로 총알이 몸에 피격될 때의 힘만이 느껴졌을뿐,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중상을 입은 것치고는 회복이 빨라서[* 팔다리를 맞은 건 그렇다고 쳐도 몸에도 4발이나 맞았는데 기적적으로 급소를 비껴맞았는지 신경 손상이 없었다고 한다.] 두 달 뒤에는 신형 구축전차 [[야크트티거]]를 운용하도록 약 반년동안 파데스보른 전차병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후 전쟁이 끝나가는 1945년 3월 8일 제512중구축전차대대 소속 중대장으로 부임하여 아크트티거와 함께 서부전선의 영미군을 상대로 한 방어전을 전개하게 된다. 비교적 날렵하고 기동성이 좋았던 티거에 익숙했던 오토 카리우스는 느리고 육중한 야크트티거를 매우 싫어했으며, 특히 고정식 전투실(포탑)의 전투력 한계와 엄청난 무게에서 오는 변속기와 서스펜션의 고장빈도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도 야크트티거의 128mm 주포의 화력에 대해서는 매우 만족을 표했다. 실제로 전쟁 말, 바이데나우 동쪽 고지를 점령하려는 작전에서 야크트티거로 집 뒤로 황급히 숨은 미군 전차를 보고 포탄 신관을 지연식으로 설정한 후 포격해서 집을 관통하고 격파했다. 1945년 4월 15일에 [[미합중국 육군]]에게 항복하였고 이로써 그의 전쟁은 끝났다. 전쟁 기간동안 주로 티거를 사용해서 약 150대의 연합군 전차를 격파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전차 격파수는 당시 독일군 전차 에이스들 전체에서 168대를 기록한 [[쿠르트 크니스펠]] 상사에 이은 2위였다. 이 전차 격파수 기록에 대전차포 격파수 같은 다른 기록과 공인되지 않은 기록을 포함한다면 약간의 변동이 있을 수 있으나 이러한 비인가 기록은 다른 슈퍼 에이스들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전설의 에이스인 만큼 독일군의 유명인사들도 많이 만났고 이를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회고록을 읽어보면 동부 전선을 바쁘게 오가던 [[발터 모델]] [[원수(계급)|원수]]의 명령을 직접 받은 적이 여러 차례 있고[* 전략 예비대인 티거 중전차 대대인 데다가 본인이 굴지의 티거 에이스이니만큼 모델 입장에선 최중요 전략 카드 중 하나였을 테니, 여기저기서 몰려오는 소련군을 분쇄하기 위해 절찬리에 마구마구 굴렸을 것이다.][* 나르바 전역에서는 '태어나서 그렇게 호된 질책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라고 기록할 만큼 혼이 나기도 했다. [[발터 모델]] 문서를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자신 스스로 모범을 보이며 사병들을 최대한 배려하는 동시에 장병들의 목숨을 책임지는 지휘관인 장교들에게 매우 엄격한 성격이었다. 카리우스 또한 당시 중위계급으로 중대장을 맡고 있었으니(...). 하지만 카리우스는 모델 원수가 전장의 장병들에게 존경받고 있다는 것과 그 또한 장병들에게 너그러웠던 유능하고 책임감 강한 지휘관임을 언급하며, 루르 고립지대에서도 모델 원수의 지휘를 직접 받았던 만큼 [[자살|그의 최후]]를 굉장히 안타깝게 여겼다.] 잘츠부르크에서 [[하인리히 힘러]] SS장관에게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은 원래 [[아돌프 히틀러]] [[총통]]에게 받아야 했었지만, 전쟁통이라 바빠서 힘러가 대리했다. 힘러에게 실전도 모르는 주제에 허풍만 일삼는 나치 지도자들의 광신성, 그리고 국방군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무장친위대의 특별대우에 대해 직설적으로 비판했는데 의외로 힘러는 솔직하게 그걸 인정했지만 히틀러처럼 '버티다 보면 [[나치의 비밀무기|신무기]]가 완성돼서 적을 쓸어버릴 테니 버텨달라'는 현실과는 백만광년 떨어진 얘기를 했다고 한다. 다만 힘러 본인도 그럴 수 있으려면 적어도 1년 동안은 전선이 유지되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오토 카리우스는 "잘 알겠습니다. 그럼 불가능하다는 거군요."라고 답했는데, 의외로 별 말 없었다 한다. 그렇지만 비인간적인 줄 알았던 힘러가 의외로 웃기는 양반이어서 비쩍 마른 카리우스에게 연회장에 있던 뚱뚱한 장군을 가리키며 '이 사람 몸무게의 절반만 따라가라'고 말해 좌중이 폭소를 터뜨렸다는 에피소드도 언급했다. 나르바 공방전에서는 [[히아친트 그라프 슈트라흐비츠 폰 그로스-자우헤운트캄미네츠]][* Hyazinth Graf Strachwitz von Groß-Zauche und Camminetz, 1893.7.30 ~ 1968.4.25. 최종 계급 예비역 [[중장]]이다. '''다이아몬드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 서훈자'''이다. [[슐레지엔]]의 전통 있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원래는 승마에 능해 1914년 베를린 올림픽 국가대표로 지명됐으나 [[제1차 세계 대전|하필이면 그해 전쟁이 터져]] 장교로 종군하다 막바지에 포로가 돼 프랑스 육군이 그를 파르티잔으로 오해하여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다.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예비역 장교로서 종군하였다. 12회의 전상을 입으며 [[프랑스 침공]]을 비롯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키예프,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나르바 등 격전지에서 싸웠으며 종전 후 시리아 육군 고문으로 지낸후 서독으로 돌아와 생활하다 폐암으로 사망했다. 2차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출신의 육군 영관급 장교 에른스트 폰 슈트라흐비츠와는 먼 친척관계라고 하며 현재도 슈트라흐비츠 가문은 잘 유지되고 있다.]의 전투단과 함께 작전을 짜며 소련군에게 반격했으며 [[슈츠슈타펠]] 제 11 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의 사단장 프리츠 폰 숄츠와 만나 협력을 약속하여 노르트란트 사단의 나르바 공방전을 도왔다.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 수여 후 잘츠부르크를 관광하고 열차에서 머무르는 동안 SS 제4기갑[[군단장]] [[헤르베르트 오토 길레]]와 자주 전화하여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제502 중전차 대대로 복귀 신청을 하기 위해서 베를린까지 가는데 친위대 장교들의 차를 얻어 타고 가면서 야보[* 공격기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의 약자이다.]의 습격 방송을 듣고 굴다리로 대피한 일화와 미 [[육군 항공대]]의 [[폭격기]]들이 장교들과 함께 방문했던 로이나 합성석유 공장을 향해 융단 폭격을 하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감상평은 "설명을 들은 대로 공장에 스파이가 있어야 저걸 재건 기간에 맞춰 박살내지"였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그도 전차 지휘관답게 연합군의 항공 전력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전차가 아무리 뛰어나도 이기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